그 시절의 ‘국민 히트송’이라는 이름에 가려져 이 곡의 실험정신을 한참 지난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. 처음엔 브람스로 추정되는 빈티지한 관악기 선율이 들려, 내가 노래를 잘못 재생했나? 오해했다. 그러다 곧 믹싱 사운드와 함께 부드러운 미디 사운드와 스냅이 등장한다. 여기서 한 번 더 꺾어서야 우리에게 익숙한 레트로한 힙합 비트가 등장한다. 이 도입부터가 내게는 매우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. 그리고 그 속에서 전체적으로 여름의 감상이 훅 느껴졌다. 그리고 그보다 충격이었던 것은, ‘운명’이라는 낭만적인 제목 속에 숨겨진 곡의 스토리였다. 이미 만나는 사람이 있는 ‘나’의 앞에 평생을 찾아헤맨 ‘운명’ 같은 상대가 등장해 두 사람을 동시에 만난다는 이야기였다...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식은 느껴지지 않고, 오히려 뻔뻔하게 ‘정말 답답해 짜증이 나 / 어떡해야 돼’라니. 노래의 신나는 분위기는 둘째 치고서, 90년대 노래 특유의 어딘가 핀트가 나간 듯한 주제에 헛웃음을 짓게 되었다. 이뿐만 아니라 이 곡에서는 무려 4개 국어가 등장한다. ‘하나, 둘, 셋, 넷’을 매 절의 도입에서 각각 스페인어, 중국어, 영어로 부른 것이다. 이렇게 실험정신이 넘치는 곡임에도 불구하고, 대중성을 갖춘 컨셉과 중독성 있는 멜로디로 국민 히트송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탄하게 될 정도다. 세기말의 실험정신은 여기서 끝이 아닌데,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부분은 2절 A 파트이다. 뜬금없이 햄릿의 ‘죽느냐, 사느냐, 그것이 문제로다’를 인용했는데, 그게 또 익살스럽게 잘 맞아들어간다. 특히 이 파트를 맡은 ‘유리’의 째지는 듯한 목소리가 이 곡에 ‘힙합’을 한 스푼 더해준다. 게다가 힙합 비트와 함께 다소 뜬금없고 의미 모를 코러스가 자주 삽입되어 있는데, 그건 또 나름대로 그 시절 감성으로 느껴져 재밌었다. 이 노래가 발매된 당시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신박하게 느껴졌을까? 너무 유명한 곡이라 굳이 찾아 듣진 않았는데, 우연히 2025년 내 여름은 쿨이 되었다. 그게 또 나의 ‘운명’으로 느껴진다.